2015/12/30 도쿄 산 파우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얼른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12월 30일부터 1월 3일까지 4박 5일 도쿄 여행을 하게 되어, 레스토랑 순례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두 달 전부터 캉테상스, 샤넬 베이지, 조엘 로부숑 등의 식당에 예약을 시도했으나, 신정 연휴라 휴무인 식당이 대부분이고 영업을 한다 해도 온라인 예약을 2인 이상만 받는다는 이유 등등으로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후쿠부쿠로 쇼핑이나 하기로 했는데, 출국 며칠 전에 극적으로 산 파우(Sant Pau) 도쿄 지점의 존재를 알고 예약 성공! 운 좋게 딱 12월 30일까지 영업을 해서, 전화로 저녁 7시에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온라인 예약을 시도했을 때는 자리가 없다더니 전화하니까 있다더라... 앞으로는 온라인 예약은 그냥 무시하고 전화로 하기로 결심했다. (전화는 여기저기 많이 해 봤는데 영어가 거의 통하긴 한다. 발음을 알아듣기 어려워 반쪽짜리 일본어를 섞어 써야 했지만...)
산 파우는 스페인의 여성 셰프인 카르메 루스카예다(Carme Ruscalleda)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산 폴 데 마르(Sant Pol de Mar)에 본점이 있고 도쿄에 지점이 있다. 그 외에 바르셀로나에서 레스토랑 모먼츠(Restaurant Moments)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예약이 7시 30분이었는데, 나리타 공항에 5시 30분쯤 착륙해서 스카이라이너를 타고 갔더니 정확하게 도착했다. 위치는 니혼바시 역에서 도보 5분 미만.
메뉴는 단품 메뉴와 코스 메뉴 두 가지가 있는데, 늘 그렇듯이 언제 또 오겠나 싶어서 23,000엔짜리 메누 데구스타시오에 12,000엔짜리 와인 6종 페어링을 추가했다. 와인 페어링은 3종, 5종, 6종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서론이 길었는데, 드디어 기본 세팅.
화병에 생화 한 송이가 꽂혀 있다.
옆 테이블. 깔끔하고 조용한 분위기.
식전주 까바. 와인도 모두 스페인 와인이었다.
와인잔은 리델, 츠비젤 1872 등 최고급 브랜드가 섞여 있었다. 사진의 잔은 브랜드를 모르겠지만 츠비젤 1872 못지않게 얇고 가벼웠다.
위 사진에서 제일 왼쪽에 있던 종이를 펼치면,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를 그림을 곁들여 설명해 두었다.
빵 대신 나온 치즈 과자. 깨알같이 산 파우라고 쓰여 있다.
마지팬, 감나무 잎(かき), 쌀 식초, 염소 치즈. 잎에서 셀러리 맛이 나서, 달면서도 산뜻하다.
히나이 닭고기 파테, 자색 감자 칩, 자색 겨자. 히나이는 일본 토종 닭의 일종이고, 자색 겨자(violet mustard)는 겨자에 와인과 포도를 넣어 만드는 소스인데 주로 고기와 함께 먹는다고 한다. 한입에 쏙 넣었더니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아쉬웠다.
시금치와 이리(しらこ) 라비올리. 이리는 우리가 흔히 먹는 이리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이리 안에는 호두가 들었고, 은근한 유자 향까지.
첫 번째 화이트와인 코스테르스 델 세그레 클로스 폰스 록 데 폭(Costers del Segre Clos Pons Roc de Foc). 맛이 진해서 꼭 레드와인 같았다.
매니저가 사진 촬영 소리를 좀 줄여 달라고 부탁했는데, 검색을 해 보니 a7s에는 무음 촬영 기능이 있는데 a7에는 없다고 한다... 초점이 맞을 때 삑 소리가 나는 것만 끄고, 최대한 사진을 덜 찍겠다고 양해를 구했더니 고맙다고 했다. 그래서 아래부터는 요리 하나에 한 장으로 승부!
호박 채를 올리고 만체고 치즈를 곁들인 랍스터 요리.
두 번째 와인, 보데가스 산 알레한드로(Bodegas San Alejandro)의 발타사르 그라시안 로제(Baltasar Gracián Rosé). 아라곤 지역 와이너리에서 가르나차 품종으로 만드는 로제 와인이다. 딸기 향이 나고 달콤했다.
'오징어 2015'라는 이름의 오징어 요리. 오징어 간과 먹물, 순무, 메밀 잎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맛이나 질감이나 그야말로 오징어의 모든 것을 한 번에 맛보는 느낌이었다.
사보이 양배추, 부추, 트러플이 들어간 에스쿠데야. 에스쿠데야(escudella)는 카탈루냐 지방의 수프다. 필로타(pilota)라는 커다란 고기 완자가 들어가는 게 특징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고기를 양배추로 쌌다. 풍부하고 깊고 고기고기한 맛이 대박. 채를 쳐서 넣은 트러플의 향이나 맛은 의외로 강하지 않았다.
다음 와인 칸 페익세스 샤르도네(Can Feixes Chardonnay)와 함께 와인 도열. 얇고 가냘픈 잔들이 아름답다ㅠㅠ 이번 와인은 카탈루냐 페네데스(Penedès) 지방에서 만드는 와인이라고 한다.
사프란 소스, 흑마늘, 퀴노아를 곁들인 게르치. 일본어로는 黒鯥(くろむつ)라고 하는데 식재료로 자주 사용하는 모양이다. 탱글하게 익힌 생선과 톡톡 터지는 퀴노아, 은은한 소스가 이루는 식감 조합이 재미있었다.
메인 와인인 알론소 델 예로(Alonso del Yerro). 품종은 템프라니요(Tempranillo)라고.
밤, 수프, 케이크, 콩피를 곁들인 '호셀리토(Joselito)' 이베리코 목살. 돼지고기가 이럴 수 있다니... 어마어마하게 부드럽다. 후추 향이 강한데 맛은 강하지 않다. 달짝지근한 케이크가 목살과 매우 잘 어울렸다. 페어링 와인의 신맛과 소스의 짠맛까지 완벽한 조화.
콘트라스트가 있는 치즈. 다섯 가지 종류의 치즈와, 각 치즈와 대조를 이루는 음식을 짝으로 구성한 요리였다. 엄청난 고민이 있었던 듯해 감동적이기까지...
디저트 와인 오초아 모스카텔(Ochoa Moscatel). 품종은 역시 머스캣이다. 모스카토랑 비슷하겠지, 싶었는데 새롭고 미묘한 단맛이 났다.
프리 디저트로 셔벗.
부라티나(burratina) 치즈와 토마토, 바질로 만든 카프레제. 부라티나는 모짜렐라와 크림으로 만든 치즈라고 한다. 거품처럼 가벼운 치즈에 산뜻한 토마토 페이스트가 깔려 있는 것이 거의 충격적인 맛이었다. 익숙한 맛에 질감만 달라도 이렇게 새롭구나...
고구마 무스, 초콜릿 크림, 위스키가 든 블랙 초콜릿 롤. 얇고 바삭바삭한 껍데기에 양쪽을 막은 동전 초콜릿, 안의 진하고 꾸덕꾸덕한 초콜릿 크림까지, 초콜릿을 집대성한 듯한 디저트. 메뉴에 맞춰 준비한 접시도 흥미롭다.
코스의 하이라이트, 가우디의 용. 구엘 공원에 있는 용 모습을 본따 만든 디저트다. 접시도 센스 폭발! 비스킷의 일종인 스페쿨로스(speculoos), 코코넛 쿠키, 초콜릿 구슬, 통카 콩과 블랙 초콜릿, 민트와 핑크 페퍼를 곁들인 녹색 쿠키.
마지막으로 커피.
값이 싸다고 할 순 없지만, 새로운 맛과 경험을 만끽할 수 있어서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콘셉트, 최고급 식기와 와인잔, 요리를 하나하나 충실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서비스까지 무엇 하나 아쉬운 게 없었다. 미슐랭 별 세 개인 오사카의 후지야 1935보다 비견할 만했다. 서울에 있었으면 메뉴 바뀔 때마다 가고 싶은 식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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