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번역의 기본기
최근에 게임 번역 전문 벤더의 요청으로 프리랜서 지원자들의 시험을 채점했다. 열 개 가량 채점했는데, 통과는 단 한 명이었고, 그것도 특정 장르에서만 통과였다...
물론 밖에서 보기에 번역이 만만해 보인다는 건 잘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정말 충격이었다. 게임 번역이 아무래도 열정(?)이 작용하는 분야다 보니 타 분야보다 더 심할 수는 있을 듯하지만... 그래도 테스트에 응시한다는 건 일을 받고 싶어서일 텐데, (능력이 부족한 거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성의가 부족한 경우도 많아서 더욱 충격이었다.
감점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영어 이해력은 뛰어난데 한국어 표현력이 수준 이하인 지원자도 있고(이런 경우는 아마 교포일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한국어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오역이 너무 많은 지원자도 있다. 한국어 맞춤법은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말 까다로운 띄어쓰기는 차치하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르키다")를 쓴 사람도 둘이나 됐다. 처음 몇 개 이후로는 맞춤법으로 인한 감점 폭을 일부러 줄였는데도 총계를 내면 합격 기준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써 본다. 게임 번역의 기본기.
1. 영어/한국어 실력
내가 영한 번역을 주로 하니 영어, 한국어라고 쓰긴 했지만 사실 모든 출발어-도착어 쌍이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통 번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영어보다 한국어를 잘 구사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이것 때문에 영어 실력 요건이 과소평가될까 봐 걱정이다. 영어는 그야말로 기본이다. 그리고 바로 이해가 안 된다면 사전을 찾아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 위의 시험에서도 사전만 찾아보면 바로 나오는 표현을 어색하게 직역을 한 경우가 (안 그런 경우보다 더) 많았다. 그냥 해석해서 뭔가 이상하다면 내가 모르거나 잘못 아는 것이니 검색, 또 검색해야 한다.
원문을 이해한다는 건 그저 '말뜻'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맥락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대화문을 번역하는 경우 대사 하나하나의 뜻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관계와 감정,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해야 확신을 갖고 직역을 넘어서서 창의적인 번역을 할 수 있다. 원문에 확신이 없을수록 안전하게 "직역"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허 번역이나 기술 번역은 말할 것도 없고 출판 번역에 비해서도 게임은 원문에서 훨씬 자유로운데, 게임의 목적 자체가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락을 완전하게 파악하고 그걸 바탕으로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말을 만들어 내는 게 더 중요하다.
영한 사전과 어번 딕셔너리(http://www.urbandictionary.com/)에서 단어 뜻을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위키피디어, 일반 구글 검색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관련 정보도 파악해야 한다.
한국어 실력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우선 읽기 쉬운 한국어를 쓰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글을 쓸 때는 멀쩡한 사람도 왠지 번역을 하면 어색해지는 현실... 이런 면에서는 번역이나 문체에 대한 책을 읽고 참고하면 많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짚으면서 바람직한 한국어 번역 문체를 소개하는 <번역의 탄생>을 강추한다.
물론 띄어쓰기까지 100% 엄격하게 지키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걸 안다. 나름대로 맞춤법에 집착하는 편인 (그리고 편집, 번역 경력이 도합 10년을 넘는) 나도 아직까지 사전을 수시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띄어쓰기는 틀리지 말자. 예컨대 위의 시험을 채점할 때는 "~하 겠다"라고 쓴 지원자도 봤다. 단어와 단어는 (조사를 제외하면) 띄우고 본용언과 보조용언은 (원칙적으로) 띄우며 조사는 붙이고 의존 명사는 띄운다든지 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숙지하고, 헷갈리기 쉬운 부분만 따로 알아두면 기본은 할 수 있을 듯하다. 시중에 맞춤법 책이 많이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사전에 한 단어로 나오면 붙이고 아니면 띄운다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물론 "-당하다" "-받다"처럼 따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아도 붙이는 경우가 있고, "안갯속" "뱃속" "한번"처럼 비유적인 상황을 나타낼 때만 한 단어로 쓰는 경우도 있으니 정말 100% 맞으려면 그때그때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결과물의 품질만 놓고 보면 마지막에 맞춤법 검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워드의 맞춤법 검사 기능은 믿을 수 없고, 부산대학교 우리말 배움터에서 제공하는 맞춤법 검사기가 제일 정확하다.
하긴 리뷰어가 맞춤법을 잘 몰라서 맞게 해 간 것을 틀리다고 표시해 온 경험도 두어 번 있었다. 아마 피드백이 나한테까지 오지 않은 경우를 포함하면 더 많을 듯. 그럴 때면 나 혼자 열심히 띄어쓰기 지켜 봐야 무엇하나 싶기도 하다...
2. 맥락 파악
게임 번역의 경우 맥락을 알고 번역하기가 아주 어려운 편이다. 일단 스트링이 하나하나 쪼개져 있고, 정보라고는 개발사에서 주는 짤막한 힌트뿐이다. 개발사가 현지화에 경험이나 개념이 없는 경우에는 정말로 아무런 정보 없이 스트링만 달랑 오기도 한다. 위의 스크린샷을 보면 웬 발번역이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게임 번역을 해 본 입장에서는 그저 비웃을 수만은 없다. 개발사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off"만 딱 주었을 가능성이 95%기 때문이다. 심지어 앞의 "%" 문자조차 없이.
그렇다면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게임을 알아야 한다. 인기 장르의 게임을 몇 가지 실제로 해 보면 대충 어떤 상황에 어떤 말이 나오는지 감이 잡힌다.
그런 다음에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웬 뜬구름 잡는 소리냐 싶을 수도 있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센스가 정말로 중요하다. 물론 센스라는 건 그냥 막 작동하는 건 아니고, 게임을 잘 알아야 작동하긴 한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벤더에 문의해야 한다. 물론 기한이 워낙 짧다 보니 벤더를 거쳐 클라이언트의 대답을 받을 틈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경우에도 통용되는 "안전한" 번역이 있다면 그걸 쓰고, 그게 없다면 최대한 본인의 센스를 믿는 수밖에 없다.
3. 주어진 정보 활용
2번과 관련이 있는데, 개발사에서 준 정보를 꼭 참고하자. 시험을 평가하다 보니 A열에 텍스트의 맥락 정보가 주어져 있는데도 참고하지 않고 번역한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위 스크린샷에 나오는 off 옆에 sale이라는 코멘트가 있었다면, 그리고 작업자가 그걸 참고해서 옮겼다면 "끄기"로 번역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4. 용어 통일
게임 작업은 웬만하면 CAT로 진행하는데, 용어를 기존 TM과 통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게임 하나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TM에서 기존 용어를 열심히 검색해야 한다. 용어집을 따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빠진 용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콘코던스 검색(Concordance Search)을 열심히 해서 기존 번역과 통일해야 한다. 예를 들어 Dark Essence라는 아이템이 기존에 '어둠의 정수'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걸 찾아보지 않고 '암흑 정수'라고 번역한다면,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아이템이라는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통일은 ("사소한") 띄어쓰기 오류나 매끈하지 않은 번역에 비해 사용자의 게임 경험에 실제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니 특히 주의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첫 글자가 대문자인 경우 모두 용어라고 생각하고 찾아보면 된다.
용어뿐만 아니라 스타일도 통일해야 한다. 예를 들어 퀘스트 목표의 경우 영문에서는 명령문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기존 번역이 '~하기'라면 새로 번역할 때도 모두 '~하기'로 맞춰 주는 게 좋다. 사실 스타일의 경우 반복적인 문장은 TM 매치로 잡히기 때문에 통일을 안 하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공동 작업을 하다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안 하는 작업자가 있다...
이 외에도 희망 사항은 많지만, 다 적자니 너무 길어질 듯하여 기본기만 나열해 본다. 게임 번역 시험에 응시하시는 분들은 이 정도만 조심하면 "기본이 없다"라는 평가를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